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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이탈리아의 중세 감성과 축제를 걷다: 밀라노부터 베네치아까지

by 김춘옥 TV 2025. 4. 4.

시작하며

뛰어난 문화유산과 첨단 패션이 공존하는 도시, 밀라노.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고 중세적인 도시 풍경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느껴본다. 150년 전통의 비아레조 카니발에서 만난 거대한 종이 인형, 비사의 사탑 꼭대기에서 느껴본 짜릿한 순간, 토스카나의 작은 도시 루카에서 만난 중세의 흔적. 세계 3대 카니발 중 하나인 베네치아 가면 축제까지, 다채로운 축제가 넘쳐나는 이탈리아로 향했다.

 

1. 밀라노에서 만난 문화유산과 도시 풍경

나는 인천공항을 출발한 지 14시간 만에 이탈리아 밀라노에 도착했다. 밀라노는 이탈리아 북부 최대 도시로, 역사와 문화적 전통이 깊어 볼거리가 풍부하고 밀라노 패션 위크로 세계 패션을 이끄는 도시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밀라노 중심에 있는 두오모 광장이었다.

광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수많은 첨탑으로 장식된 웅장한 밀라노 대성당이었다. 거대한 규모와 수많은 조각상들에 압도돼, 한동안 카메라를 멈추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성당 정면 청동문에는 마리아의 일생이 부조로 새겨져 있는데, 그중 '예수 그리스도의 태형'을 표현한 작품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손을 대어 다리와 손이 반질반질하다. 나도 행운을 빌며 조각 작품의 다리를 만져보았다.

성당 내부는 어떨까? 바닥은 꽃무늬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고, 쉰두 개의 거대한 기둥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다. 외부의 화려함에 비해 내부는 단순하고 간소한 선이 인상적이다. 중앙 복도의 가장 높은 부분은 무려 45m에 이르고, 앞쪽으로 가자 인상적인 조각상이 보였다. 온몸에 살가죽이 벗겨진 채 순교한 성 바르톨로메오의 조각상이 깊은 여운을 남겼다.

성당 뒤쪽의 대형 창문에는 고딕 양식의 스테인드글라스가 화려하게 채워져 있었고, 성경의 이야기를 그림처럼 표현한 모습이었다. 이 성당의 독특한 점은 옥상을 유료로 개방한다는 것이다. 250개가 넘는 계단을 오르거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있는데, 나는 계단을 이용해 올라갔다. 수많은 첨탑 사이로 보이는 밀라노의 전경은 감탄을 자아낸다.

옥상 중앙 테라스에 도착하면 135개의 섬세하게 장식된 첨탑과 수많은 대리석 조각상들이 펼쳐진다. 지붕 꼭대기에는 약 108m 높이의 중앙 첨탑이 있고, 그 위에는 금빛 성모 마리아상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는 정교한 첨탑과 조각상을 가까이서 볼 수 있고, 첨탑 너머로 보이는 과거와 현재의 밀라노 풍경은 마치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을 준다.

 

2. 밀라노 두오모 옥상과 갈레리아

이 성당은 특이하게 옥상을 유료로 개방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나 250개가 넘는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는데, 나는 계단을 선택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첨탑들 사이로 보이는 밀라노 전경이 점점 넓게 펼쳐졌다. 옥상에 도착하니 정교하게 조각된 135개의 첨탑과 수많은 대리석 조각상들이 가득했고, 그 사이로 도시의 과거와 현재가 한눈에 들어왔다. 지붕 꼭대기 중앙에는 108미터 높이의 첨탑이 있고, 그 위에 금빛 성모 마리아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성당 북쪽에는 이탈리아 통일을 이룬 빅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기념해 지어진 '갈레리아 빅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쇼핑센터가 있다. 1877년에 완공된 이 건축물은 철골과 유리를 사용해 지어졌고, 구조 자체가 예술로 평가받는다. 갈레리아 중심에는 십자가형의 통로가 있고, 그 주변에는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상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바닥에는 황소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발뒤꿈치를 올리고 그 위에서 세 번을 돌면 행운이 온다는 전설 때문인지 바닥에 움푹 패인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 갈레리아는 두오모 광장과 스칼라 광장을 연결하고 있으며, 스칼라 광장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약 2km 떨어진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에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보관돼 있다. 작품 손상을 막기 위해 하루 관람 인원이 제한되고, 단 15분만 관람이 허용된다. 다빈치는 성경을 꼼꼼히 분석하고 제자들의 성격을 세심하게 반영해, 표정과 자세만으로도 인물을 구분할 수 있도록 묘사했다고 한다.

 

3. 친퀘테레의 보석, 베르나차

밀라노에서 남쪽으로 약 2시간 반 떨어진 라스페치아로 이동했다. 이곳은 '친퀘테레'라 불리는 다섯 개 해안마을로 가는 관문이다.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네 번째 마을인 베르나차였다. 아침 햇살이 이 마을을 가장 아름답게 비추는 시간대라 전경 사진을 찍기에 제격이었다.

언덕에 계단식으로 조성된 경작지에서는 포도와 올리브가 주로 재배되고 있었다. 산책 중 만난 고양이의 귀여운 묘기에 발길이 잠시 멈췄다. 경작지 사이로 이어지는 오래된 오솔길은 지금은 관광객들의 트래킹 코스로 인기다. 베르나차는 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유서 깊은 마을로, 1276년에는 제노바 공화국에 속하게 됐다.

이곳의 명물로 꼽히는 해산물 튀김을 맛보기 위해 한 가게를 찾았는데, 테이크아웃 전문점이었다. 포장해 길거리에서 먹었지만 바삭하고 풍미 가득한 튀김 맛에 감탄했다. 오징어 튀김의 식감은 한국과 매우 흡사했다.

 

4. 코르닐리아와 마나롤라

친퀘테레 다섯 마을 중 세 번째 마을인 코르닐리아는 해안선이 아닌 절벽 꼭대기, 해발 100m 지점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마을에는 항구가 없어 접근하려면 도보나 셔틀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코르닐리아는 잘 정비된 산책로를 통해 다른 마을들과 연결돼 있었다. 이 다섯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자동차로 이동하기 어려워, 라스페치아에서 제노바 방향으로 향하는 철도 노선으로 접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코르닐리아에서 마나롤라까지 이어지는 산책로는 친퀘테레 국립공원 내에서도 특히 아름다운 경관으로 손꼽힌다. 친퀘테레 두 번째 마을인 마나롤라는 대표적인 사진 명소로 자주 소개된다. 이 마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해 질 녘에 볼 수 있다. 석양빛이 마을을 물들이며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좋은 자리를 잡아 석양이 내려앉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졌다. 해가 점점 기울면서 마을은 점점 더 아름다워졌고, 나 역시 그 풍경 속에 스며들었다. 다음 날, 일출을 보기 위해 이른 아침에 나갔을 때 우연히 추모비 하나를 발견했다. 2007년 이곳에 휴가를 왔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미국인 세라를 기리는 비석이었다.

 

5. 비아레조 카니발

친퀘테레의 관문인 라스페치아에서 해안 도로를 따라 약 45분 정도 이동하자 이번 여행의 주요 목적지인 비아레조에 도착했다. 발코니에 걸린 다채로운 장식물과 거리 사람들의 복장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리고 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오늘은 바로 유명한 비아레조 카니발이 열리는 날이었다. 나도 입장권을 구매하기 위해 매표소에 줄을 섰다. 티켓 가격은 22유로, 우리 돈으로 약 32,000원 정도였다.

비아레조 카니발은 우리에겐 다소 생소하지만, 유럽에선 오랜 전통을 가진 행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미 많은 관광객이 모여 퍼레이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대한 조형물을 얹은 퍼레이드 차량들이 차례로 등장했는데, 각 작품마다 분명한 제목과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지구 온난화로 다시 살아난 매머드를 통해 소비주의와 자연 파괴를 경고하거나, 거미줄처럼 퍼진 마약 밀매의 위험성을 표현하기도 했다.

퍼레이드 차량 위에는 밀가루와 물을 섞은 천연 접착제와 신문지를 이용해 만든 종이 인형들이 탑승해 있었다. 이 거대한 인형들이 어떻게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지 궁금했는데, 차량 뒤편에선 조종자들이 쇠사슬을 당기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사회의 사악함과 공격성을 공룡의 이미지로 표현했고, 선정성과 가시성을 추구하는 소비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

 

희망을 잃은 정신질환자들에게 편견과 무관심, 두려움을 넘어서자는 메시지를 담은 작품도 있었다. 이 카니발은 수백 년의 전통을 가진 민속 축제로, 종이와 천연 재료로 인형을 제작해온 장인의 손길이 세대를 거쳐 이어지고 있었다. 참가자들은 모두 흥에 겨워 춤을 추며 축제를 만끽했고, 그 열정이 현장을 찾은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됐다.

비아레조 카니발은 1873년에 처음 시작됐다. 당시에는 작게 꾸민 마차로 첫 행진을 진행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퍼레이드 규모는 점점 커졌고 작품의 사회적 메시지도 더욱 깊어졌다. 인공지능(AI)의 양면성을 경고하는 작품, 동양 전설 속 구미호 캐릭터가 등장하는 조형물도 있었다. 이 카니발의 퍼레이드는 총 네 개의 범주로 나뉘며, 이 중 소규모 행진이 뒤를 이었다. 퍼레이드에는 푸틴, 젤렌스키, 시진핑, 바이든 등 국제적인 정치 인물들이 등장해 풍자와 해학을 더했다.

인간의 탐욕이 초래할 지구의 비극적인 최후, 전쟁을 일으키는 부자들을 풍자하는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녹아내리는 시계 모티브를 활용한 작품도 있었으며, 예술가들은 작품의 움직임을 정교하게 설계해 최대한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이처럼 150년 전통의 카니발은 거대한 종이 조형물로 사회와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퍼레이드가 끝난 후에는 이동식 스피커를 따라 즉석 댄스파티가 이어졌다.

비아레조 카니발은 매년 2월 한 달간 진행되며, 퍼레이드는 총 6일간 열리는 것이 전통이다. 이 축제는 원래 1870년에 권력에 대한 항의로 시작된 역사 깊은 행사로, 지금도 그 정신을 잇고 있다. 관람객들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닌, 스스로 축제의 주인공이 되어 현장을 누빈다.

 

6. 중세의 흔적이 살아있는 도시, 루카

비아레조에서 자동차로 약 30분 거리에 위치한 루카는 토스카나 주의 도청소재지로,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곳은 '미뉴에트 2장조'로 잘 알려진 작곡가 보케리니의 고향이기도 하다. 좁고 촘촘히 이어진 골목길은 마치 미로를 걷는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광장 한켠에는 푸치니 동상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의 생가는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1901년에 푸치니가 직접 구입했다는 피아노는 아직도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집안 곳곳에는 그의 초상화, 사진, 악보, 편지, 오페라 공연에 사용됐던 의상들이 보관되어 있다. '나비 부인' 여주인공의 기모노와 유작 '투란도트'에 사용됐던 화려한 의상도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푸치니는 22세까지 이 마을에서 살다가 밀라노 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나 작곡가의 길을 걷게 됐다.

루카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지가 잘 보존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 중에서도 타원형의 '안피테아트로 광장'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곳은 고대 로마시대 전차 경주가 열리던 원형 경기장이었던 장소로, 폐허 위에 건물을 지어 광장을 조성한 것이다.

 

아치형 터널문을 지나 광장 안으로 들어서자 타원형 광장이 펼쳐졌고, 이를 둘러싼 건물들은 각기 다른 높이로 서 있었다. 이 건물들은 현재 레스토랑, 카페, 상점 등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광장 중앙에는 이국적인 형태의 인형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이 작품들은 비아레조 카니발에서 옮겨온 설치물로 알려졌다. 조금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이곳에서도 열렸던 카니발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았다. 밤이 찾아온 루카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7. 피사의 사탑, 직접 올라가보다

루카에서 남서쪽으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는 피사가 있다. 비아레조, 루카, 피사는 서로 30분 거리에 위치해 있어 근처를 방문한다면 세 곳 모두 둘러보기를 추천한다. 포르타 누오바 성벽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산 조반니 세례당, 피사 대성당, 피사의 사탑이 한눈에 들어왔다. 피사의 사탑은 생각보다 훨씬 많이 기울어져 있었고, 많은 관광객들이 이 탑을 배경으로 다양한 포즈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스마트폰 앱으로 측정해 보니 탑의 기울기는 약 5.6도였다. 직접 꼭대기에 올라가 보기로 했고, 계단을 오르는 동안 몸이 한쪽으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계단도 한쪽이 많이 닳아 있었는데,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올랐다는 증거였다. 약 297개의 계단을 올라 도착한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피사 대성당의 전경은 정말 장관이었다.

종이 있는 종실은 한 층 더 위에 있었고, 그곳엔 총 7개의 종이 매달려 있었다. 마침 종이 울리는 순간에 도착해, 다소 시끄럽지만 인상 깊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탑 아래층으로 내려와 다시 위를 바라보니, 천장 중심이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현재 이 탑은 약 5.5도 기울어져 있지만, 2001년 보수 공사 이후 더 이상 기울지 않는다고 한다. 이 아름다운 사탑이 앞으로도 지금처럼 유지되기를 바란다.

 

8. 물의 도시 베네치아, 가면 축제 속으로

피사를 떠나 이번에는 베네치아로 향했다. 이탈리아의 고속도로는 배수성 포장이라 비가 와도 물이 튀지 않아 신기했다. 베네치아 중심부는 자동차가 다닐 수 없기 때문에 외곽에 주차한 후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했다. 이 도시는 석호 주변의 개펄을 인공섬으로 연결해 조성된 곳으로, 섬과 섬을 잇는 다양한 크기의 배가 주요 교통수단이다.

수상 버스인 바포레토는 20개 이상의 노선을 가지고 있고, 축제 참가자들은 전통의상을 차려입고 우산을 쓰고 이동하고 있었다. 베네치아 가면 축제에 참여하려는 관광객들은 직접 가면을 준비하거나 현지 상점에서 구매한다. 산 마르코 광장으로 향하려면 도보로 이동하거나 배를 타야 하는데, 나는 골목골목을 느끼고 싶어 걸어서 가기로 했다. 좁은 수로를 따라 운행하는 전통 교통수단 곤돌라도 보였고, 곤돌라 이용 요금은 1인당 90유로, 약 13만원 정도였다.

수상 택시는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며, 산 마르코 광장으로 가는 길목에는 다양한 상점이 즐비했다. 걸어가다 보면 베네치아 본섬을 가로지르는 대운하를 만나게 되고, 이 운하를 처음으로 연결한 리알토 다리가 나타난다. 이 다리 근처에는 다리 전망을 감상하며 식사할 수 있는 야외 카페들이 많아 나도 잠시 여유를 즐겼다. 짜장면처럼 보이는 먹물 스파게티는 이곳의 인기 메뉴다.

날씨는 흐렸지만 리알토 다리 주변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이 다리는 13세기에 나무로 처음 지어진 후 16세기에 대리석으로 재건됐다. 다리 위에는 귀금속과 가죽 제품을 파는 상점들이 줄지어 있고, 그 길을 따라가면 산 마르코 광장에 도착하게 된다.

 

9. 산 마르코 광장에서 만난 베네치아의 역사와 축제

산 마르코 광장은 베네치아인들이 사랑하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벌써 많은 사람들로 광장이 북적이고 있었다. 산 마르코 대성당은 마가복음의 저자 성 마르코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성당 안에는 특별한 모자이크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이집트에서 전도 활동을 하던 성 마르코가 이교도에게 살해당한 뒤, 그의 유해를 베네치아 상인들이 몰래 빼돌려오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당시 상인들은 돼지고기로 유해를 덮어 이슬람교도들의 눈을 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성당 외부에 있는 네 마리의 청동 말 조각상도 특별한 사연이 있다. 사실 이 조각상의 진품은 2층 박물관에 있으며, 고대 그리스 시대에 만들어져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것을 제4차 십자군 원정대가 약탈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후 나폴레옹에게 약탈당해 프랑스로 옮겨졌지만, 다시 반환되어 현재의 위치에 돌아오게 됐다.

산 마르코 광장은 화려한 복장과 가면으로 변장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베네치아 가면 축제 기간에는 전 세계에서 다양한 의상과 가면이 총출동해 화려한 볼거리를 연출한다. 갑자기 공룡 복장을 한 참가자가 등장해 예상치 못한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달려든 공룡에게 안기며 당황스러운 순간도 있었지만, 축제의 자유로운 분위기 덕분에 즐겁게 넘길 수 있었다.

비가 많이 오고 만조 시기가 겹치면 바닷물이 광장 위로 넘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나는 산 마르코 광장을 뒤로 하고 부속섬인 브라노섬을 둘러보기로 했다. 본섬 북쪽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약 45분간 이동하면 알록달록한 풍경의 브라노섬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은 가수 아이유가 뮤직비디오를 촬영해 국내에서는 '아이유 섬'으로도 알려진 곳이다.

 

10. 브라노섬에서 만난 레이스 장인의 손길

브라노섬은 손으로 짠 레이스로 유명한 곳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어업에 종사하고, 여자들은 남편을 기다리며 레이스를 짜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솜씨가 워낙 좋아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고, 베네치아의 대표적인 특산품으로 자리 잡았다.

유명 인사들이 다녀갔다는 한 레이스 공방을 찾았다. 이곳에서 대대로 레이스 수공업을 이어온 에밀리아에게 브라노 레이스의 역사에 대해 물어봤다. 그녀는 레이스는 종이에 디자인한 뒤, 바늘과 실로 일곱 가지의 다른 기법을 사용하는 7명의 여인이 함께 만든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톰볼로’라는 레이스 도구도 소개해 주었다.

에밀리아는 더 많은 작품을 보여주겠다며 나를 가족 박물관으로 안내했다. 이곳에는 1700년대에 만들어진 원피스를 비롯해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고, 레이스의 역사와 정교함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대운하 주변에 있는 카 도로 궁전을 본뜬 레이스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섬세했다. 브라노섬에서는 길을 걷다 멈춰서는 곳마다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섬에서 너무 오래 머물러 배 시간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했다.

본섬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고 가며 드문드문 떠 있는 섬들을 바라보니, 초기 베네치아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가면 축제를 즐기기 좋은 날씨가 되었다. 베네치아 카니발에서는 누군가 사진 촬영을 요청하면 자세를 취해주는 것이 전통처럼 여겨진다. 나 역시 준비해 간 가면을 쓰고 사진 요청에 응했다.

이 가면은 색칠놀이용으로 직접 색칠해 가져간 것인데, 이렇게 활용하게 되어 뿌듯했다. 베네치아 카니발은 매년 약 300만 명의 관광객을 끌어모은다. 귀에 익숙한 전통 북 장단 소리를 따라가 보니 흥미로운 거리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왜 이런 동양풍 공연이 열리는지 생각해보니, 올해가 바로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 사망 700주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축제에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대표단도 참여하고 있었다.

 

마치며

산 마르코 광장에는 전 세계에서 온 멋진 가면을 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나는 두루마기를 입고 대감 감투와 탈을 쓴 모습으로 다녔는데, 외국인들이 자주 사진 촬영을 요청했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인지 부끄럽지 않고 당당한 기분이었다. 독특한 가면을 쓴 사람들은 관광객들과 함께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이런 가면 축제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우리말로는 ‘사육제’로 번역되는 카니발은 원래 가톨릭 국가에서 사순절을 앞두고 열리는 행사다. 베네치아 카니발도 종교 행사로 시작됐지만, 지금은 종교적 의미보다는 모두가 함께 즐기는 축제로 변모했다. 축제 기간 동안에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듯한 다양한 가면과 의상들을 만날 수 있다. 시민들 또한 각자의 취향에 따라 옛 의상이나 현대 의상을 입고, 가면을 착용해 시간 속을 자유롭게 누빈다.

올해 베네치아 카니발은 마르코 폴로 사망 700주기를 기념하며 열렸다. 그는 아시아로의 환상적인 여행기를 남긴 인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아시아 국가 대표단들도 참여했다. 그래서 그런지 축제 현장 곳곳에서 동양적인 분위기의 공연과 장식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만든 간단한 가면을 쓴 친구들도 있었고, 흑백 대비가 인상적인 커플 가면도 눈에 띄었다. 베네치아 카니발의 매력은 바로 이런 다채로운 가면들을 만나는 데 있다. 가면을 쓴 사람들은 신분과 계급의 구속에서 잠시 벗어나, 자유롭고 해방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카니발의 대미는 마지막 날 전통 의상을 입은 12명의 소녀가 무사의 호위를 받으며 산 마르코 광장으로 행진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탈리아인들은 각기 다른 색깔과 모양의 축제를 스스로 만들고 함께 즐길 줄 안다. 그들과 함께한 이번 시간은 내 삶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더해준 뜻깊은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