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세상엔 수많은 여행지가 있다. 아름다운 해변, 화려한 유적지, 맛있는 음식이 넘쳐나는 곳들. 그런데 어떤 장소는 단순히 눈으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마음 깊숙한 곳에 감정을 남기며 오래도록 자리잡는다. 그리스의 섬 자킨토스에서의 하루가 바로 그런 날이었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고, 전혀 준비되지 않았지만, 마음이 저절로 반응했던 그 순간. 조용한 성당 안에서 눈물을 쏟았던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면서도 깊었다.
1. 커피 한 잔으로 시작된 자킨토스의 아침
그날 아침은 느긋하게 시작했다.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려고 했지만, 내부는 이미 가득 찼다. 결국 밖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게 됐다. 다행히 날씨는 맑고 따뜻해서 불편함보다는 여유가 먼저 느껴졌다.
메뉴판을 보지 않고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그런데 나온 커피는 평소 마시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작은 잔에 담긴 진한 커피, 하지만 마시는 방법부터 달랐다. 현지에서 알려준 방식은 이랬다.
- 먼저, 설탕을 위에 가볍게 뿌린다.
- 그리고 절대 저어서는 안 된다.
- 설탕이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으면서 커피 속 불순물을 잡아낸다.
- 그 상태 그대로 위쪽 맑은 층만 조심스럽게 마신다.
직접 따라 해보니, 기존의 에스프레소보다 훨씬 부드럽고 깔끔한 맛이 느껴졌다. 입에 감도는 여운이 오래 남았고, 잔을 비우는 내내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품은 한 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짧은 커피 타임이 그날 하루의 분위기를 결정지었다. 빠른 관광보다 중요한 건, 그 순간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2. 디오니시오스 성당에서 마주한 조용한 감정
커피를 마신 뒤, 가까운 성당으로 향했다. 항구 근처에 있는 디오니시오스 성당은 멀리서도 눈에 띄는 건물이었다. 외관은 고풍스럽고 단단해 보였고,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금빛으로 장식된 천장,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대리석 바닥, 그리고 성인의 유해가 안치된 유리관까지. 공간 전체가 무겁고 조용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눈으로 담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
이 성당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기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켜고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눈을 감고 있었고, 누군가는 흐느끼는 소리를 참는 듯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
특히, 어떤 노인의 기도가 눈에 들어왔다. 조용히 관 앞에 다가가 손을 얹고 오랜 시간 머물렀다. 그 뒷모습에는 어떤 설명도 필요 없었다. 그저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울컥했다. 낯선 사람의 기도였지만, 그 간절함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3. 다시 마주한 마음, 두 번째 기도
처음 성당에 들어와 촛불을 켜고 기도를 올릴 때는 마음속 소망을 담았다. 누구나 그렇듯 조용히 바라는 바를 떠올렸다. 그런데 앞서 마주한 장면, 누군가의 진심 어린 기도 앞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진심으로 기도하고 있는 걸까?’
그 생각이 마음을 붙잡았다. 단순히 ‘잘 되게 해달라’는 식의 바람이, 이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성당을 나섰다가 다시 돌아갔다. 이번에는 아무 말도, 카메라도 없이 오롯이 기도만을 위해 들어갔다.
다시 두 손을 모았을 때, 마음의 중심이 잡히는 느낌이었다. 바라는 것보다는 나를 되돌아보고, 진심으로 전하고 싶은 마음을 정리했다. 그 순간 눈물이 났다. 울려고 한 것이 아니었는데,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기도를 마친 뒤 성당을 나올 때는 들어올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마음이 가벼워졌다기보다는 단단해졌다고 느껴졌다.
4. 여행지에서 만난 작은 물건, 큰 감정
성당을 나와 걷던 중, 길가에 작은 기념품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대수롭지 않게 둘러보던 그곳에서, 작은 올리브 장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단순한 모양새였지만 이상하게도 계속 시선이 머물렀다.
자신도 모르게 그 장식을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누군가에겐 단지 장식일 뿐이겠지만, 자신에게는 방금 전 그 성당에서의 감정을 담을 수 있는 하나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여행지에서 사는 물건 중 일부는, 돌아와서 보면 그 의미가 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장식은 그러지 않을 것 같았다. 누군가의 간절한 기도, 자신이 처음으로 진심을 마주했던 순간이 담긴 물건이기 때문이다.
5. 자킨토스 거리에서 정리된 감정
성당을 나와 자킨토스의 골목을 다시 걸었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햇살은 따뜻했고, 조용한 거리엔 바다가 가까이 느껴졌다. 작은 건물들과 벽화, 오래된 나무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감정을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여행이란 단순히 어디를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어떤 감정을 겪는지에 더 의미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누군가를 따라 걷고, 사진을 찍고,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정이 그날 있었다.
그날의 자킨토스는 관광지가 아니라 하나의 경험이었다. 사람의 진심이 전해지는 공간에서, 나도 나에게 진심을 보여줬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오래도록 남을 감정이었다.
마치며
그날 자킨토스에서의 경험은 쉽게 설명할 수 없다. 단순히 예쁜 곳을 본 것도 아니고, 맛있는 음식을 먹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낯선 사람의 기도, 성당의 침묵,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 기억에 남는다.
세상의 모든 여행지가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장소는 우리가 몰랐던 감정을 꺼내주며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자킨토스는 그런 곳이었다. 계획에 없었던 눈물, 예상하지 못했던 기도,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와 마주한 하루. 그 하루는 내가 이 여행을 떠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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