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

청도 운문사 완전 정리: 화랑정신부터 비구니 승가대학까지

by 김춘옥 TV 2025. 4. 2.

시작하며

경북 청도에는 유난히 고요하고 단정한 분위기를 가진 사찰이 있다. 바로 운문사다. 이 사찰은 일반적인 절과는 조금 다르다.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비구니 수행 도량으로, 오랜 시간 동안 여성 스님들의 공부와 수행이 이뤄지는 특별한 장소다.

이 절이 자리한 곳은 '호거산'이라 불리는 산자락이다.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듯한 산세라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고, 그 기운 아래에서 천천히 숨을 쉬듯 절이 자리를 잡고 있다. 운문사를 찾아가는 길목에는 소나무가 가득한 숲길이 펼쳐져 있는데, '솔바람길'이라 불리는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차분해진다.

이 글에서는 운문사가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전각과 문화재가 있는지, 그리고 왜 이곳이 오늘날까지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차근차근 풀어가보려고 한다.

 

1. 절 이름의 유래와 위치

운문사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에 있다. 산속 깊이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절이지만, 그만큼 주변 환경이 깨끗하고 조용하다.

‘운문’이라는 이름은 고려 태조 왕건이 내렸다고 전해진다. 이름의 뿌리는 중국 당나라의 고승, 운문 문원 선사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운문사 입구부터 경내까지는 약 1.4km 정도 되는 소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이 길은 걷기만 해도 잡념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 정도로 평온한 분위기를 풍긴다.

 

2. 신라시대부터 이어진 역사

운문사의 창건은 6세기 신라 진흥왕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한 스님이 이 절을 포함해 동서남북 방향으로 네 개의 절을 더 지었고, 중앙에 지금의 운문사를 세웠다고 한다.

이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절은 운문사와 대비사뿐이다. 나머지는 시간이 흐르며 사라졌거나 흔적만 남아 있다.

당시 운문사 주변은 단순히 불교 수행만 이루어지던 곳이 아니었다. 신라 화랑들이 훈련을 받던 공간으로도 활용됐고, 진평왕 때 원광법사가 이 절을 다시 세우면서 화랑 정신의 근간이 여기서 시작됐다는 기록도 있다.

 

3. 고려와 조선을 거친 운문사의 변화

고려 시대에 접어들면서 운문사는 더욱 명맥을 이어갔다. 왕건은 절에 전답 500결을 하사하며 운문사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쓰기 시작했다. 이후 고려 숙종 시기에는 원은국사가 절을 중창하고 왕실 스승의 자리에 올랐으며, 절의 위상도 높아졌다.

삼국유사의 저자로 잘 알려진 일연 스님도 운문사에서 한동안 머물며 집필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시대로 넘어와서는 임진왜란으로 일부 전각이 불에 타기도 했지만, 이후 재건 작업이 이어졌고, 숙종 때 설송 연초 대사가 다시 절을 크게 중창했다.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운문사는 안정된 사세를 유지했다.

 

4. 비구니 교육의 중심지가 되기까지

광복 이후 한동안 대처승들이 거주하기도 했던 운문사는 1950년대 불교 정화운동을 거치면서 완전히 새로운 길을 걷게 된다. 이 시기부터 운문사는 비구니 중심의 수행도량으로 바뀌었고,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도 갖추게 된다.

1987년에는 ‘운문승가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비구니 승려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정식 출범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교육 과정이 확장돼 1997년에는 비구니 승가대학원, 2008년에는 보현유론, 2010년에는 한문 불전 과목까지 추가되며 한국 불교에서 비구니 교육의 거점이 되었다.

2024년 기준으로 이곳을 졸업한 비구니는 총 299명, 60회에 걸친 졸업식이 진행되었다. 이는 단순한 숫자를 넘어서 운문사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교육 시스템을 갖춰왔는지를 보여준다.

 

5. 범종루를 지나 사찰의 중심으로

운문사의 정문을 지나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범종루다. 마치 문처럼 경계 역할을 하며, 안쪽으로 들어서면 진짜 사찰의 세계가 펼쳐진다.

범종루에는 종과 북, 목어와 운판이 걸려 있어 새벽마다 울려 퍼지는 소리를 통해 하루의 일과가 시작된다.

이 건물을 지나면 넓은 마당과 함께 눈길을 끄는 소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단순한 고목이 아니다. 수령이 약 500년 이상 된 반송으로, ‘처진소나무’라는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돼 있다.

이 나무에 얽힌 전설도 있다. 한 스님이 시들어 죽은 가지를 땅에 꽂아두었는데, 그 가지가 다시 뿌리를 내리고 자라났다고 한다. 지금도 음력 3월 3일이 되면 막걸리를 부어 영양제로 삼는 풍습이 이어지고 있다.

 

6. 대웅보전과 응진전

운문사에서 가장 큰 건물은 ‘대웅보전’이다. 이 전각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구조로, 웅장하면서도 고즈넉한 느낌을 자아낸다. 내부에는 과거·현재·미래를 상징하는 삼세불이 모셔져 있고, 양옆으로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대세지보살, 관세음보살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불단의 양쪽에는 윤장대가 놓여 있어, 불경을 보관하거나 돌릴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대웅보전 바로 옆에는 ‘응진전’이 있다. 이 전각은 하나의 건물 안에 두 개의 법당이 함께 있는 독특한 구조이며, 안쪽에는 석가모니불과 16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운문사에 머물렀던 역대 스님들과 절을 지켜낸 장군들의 영정도 이곳에 함께 모셔져 있어, 단순한 예불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7. 비로전과 법륜상, 감천 수각

응진전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비로전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독특한 조형물들이 눈에 띈다.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수레바퀴 형태의 법륜상이다.

이 조형물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수레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 굴러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만든 것이다. 그 앞에는 ‘감천’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네모난 수각이 있다. 이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는 그릇처럼 경건한 의미를 지닌다.

비로전은 원래 대웅보전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었지만, 주불로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어 사람들이 보통 ‘비로전’이라고 부른다. 이 건물은 고려 숙종 때 원은국사가 세웠으며, 이후 조선 효종 시대에 다시 중건되었고, 최근인 2006년에도 수리가 이뤄졌다.

내부에는 청정법신을 상징하는 비로자나불과 함께, 보물로 지정된 ‘비로자나 삼신불도’가 모셔져 있다. 불단 좌우에는 신중탱화와 삼장탱화가 걸려 있으며, 천장에는 반야용선이라 불리는 배 모양의 조형이 장식되어 있다.

이 반야용선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 보살이 극락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타려 했는데, 자식들과의 작별 인사가 길어져 배를 놓치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본 지장보살이 밧줄을 던져주었고, 보살은 그 밧줄을 놓치지 않고 붙잡아 극락에 이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악착보살’이라는 이름으로 구전되고 있다.

 

8. 석탑과 오백전

비로전 앞에는 두 개의 석탑이 동서 방향으로 나란히 놓여 있다. 이 탑들은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삼층석탑으로, 보물 제678호로 지정돼 있다. 높이는 약 91cm 정도로 크지는 않지만, 각 탑의 기단에 여덟 신중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어 조각미가 뛰어나다.

풍수지리상 비로전이 배가 뒤집힌 모양을 닮아 그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세운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비로전 옆에는 ‘오백전’이 있다. 이 전각은 중앙에 석가모니불, 양옆에는 재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벽면 전체에 500나한상이 빼곡하게 배치되어 있다.

나한은 부처님의 제자 중 해탈에 이른 존재들을 의미하며, 이 나한상들은 원래 청도 적천사에 있던 것이지만, 홍수 피해를 우려해 운문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이 전각은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인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9. 스님들의 수행 공간과 금당

운문사 경내의 절반 정도는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된 구역이다. 이곳은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을 위한 공간으로, '불이문'이라는 문을 경계로 구분되어 있다. 일반 방문객은 이 문을 넘을 수 없다.

불이문 안에는 ‘작업전’이라는 전각이 있다. 이름은 과거 운문사의 다른 명칭인 ‘대작갑사’에서 유래했다. 이 건물은 보물 제93호로 지정되어 있고,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작고 아담한 구조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내부에는 석조 여래좌상과 사천왕상이 봉안돼 있다. 특히 사천왕상은 원래 존재했던 전탑의 일부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전탑이 사라지면서 이곳에 옮겨졌다는 설이 있다.

 

10. 관음전, 명부전, 만세루

작업전 옆에는 관음전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 초기 양식으로 추정되는 이 전각은 팔작지붕을 가진 정사각형 구조로, 내부에는 관세음보살과 후불탱화인 수월관음도가 봉안되어 있다.

그 옆에는 지장보살과 시왕을 모신 명부전이 있다. 지옥 세계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지장보살의 서원을 표현한 공간으로, 불교에서의 자비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운문사 중심 마당에는 ‘만세루’라는 단층 누각이 있다. 약 200평 규모의 이 건물은 사면이 모두 개방되어 있어 절의 주요 전각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법회나 행사가 열릴 때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장소이기도 하며, 원광법사가 처음 세우고 고려 숙종 시기 원능국사가 다시 중창한 역사 깊은 건물이다.

 

11. 칠성각과 국사비

절의 오른편, 정문 쪽으로 나가다 보면 ‘칠성각’이 있다. 이곳에는 치성광여래, 칠원성군, 산신도, 독성도가 봉안되어 있다. 북극성과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이 신앙 대상들은 인간의 수명과 복을 관장한다고 여겨진다.

그 근처에는 보물로 지정된 ‘원은국사비’도 있다. 고려 인종의 명으로 세워진 이 비는 원은국사 하일 스님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며, 고려 시대의 명필로 평가받는 탄연 스님이 직접 글씨를 썼다.

 

12. 운문사 역사문화관과 자연 환경

절을 나오면 약 3분 거리에 ‘운문 역사문화관’이 자리하고 있다. 2024년 9월에 문을 연 이 전시관은 운문사의 역사와 정신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전시관 중앙에는 보물인 청동 동호의 복제품이 전시돼 있다. 항아리 모양의 이 청동기는 감로수를 담는 용기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운문사의 연대기, 회주 명성 스님의 육필 원고, 불화 작품, 지승 공해 일대기, 승가대학 동문들의 작품까지 다양한 콘텐츠가 전시되어 있어, 사찰이 단지 종교적 공간을 넘어 문화 공간으로도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운문사 주변은 생태보존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숲과 계곡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북대암 등 주변 암자까지 둘러보려면 처음 지나왔던 소나무 숲길을 다시 걸어야 하며, 이 길 자체가 또 하나의 명상 코스가 된다.

 

마치며

운문사는 단순히 오래된 사찰이 아니다. 이곳에는 신라의 화랑정신이 깃들어 있고,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깊은 수행의 전통이 살아 있다.

특히 비구니 수행과 교육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은 한국 불교에서 매우 상징적이며, 이곳을 거쳐 간 많은 스님들이 오늘날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수행을 이어가고 있다.

나무 사이로 스치는 바람, 넓은 마당을 감싸는 고요함, 경내 곳곳에 담긴 정성과 이야기는 찾는 이의 마음을 자연스레 가라앉게 만든다.

조용히 걷고, 바라보고, 느끼다 보면 어느새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정리가 되는 느낌을 받게 되는 곳. 운문사는 그런 공간이다.